▲ ‘육군 12사단 훈련병 가혹행위 사망 사건 규탄 및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이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앞에서 군인권센터와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무사귀환 부모연대 주최로 열렸다. 2022년 육군 12사단 고 김상현 이병 사망사건 유가족인 김 이병의 아버지 김기철씨가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 ⓒ 권우성
지난 5월 26일 저녁 8시 27분, 속보가 하나 떴다.
'[1보] 훈련병 1명 군기훈련 중 순직'
몇 분 뒤에 나온 후속 보도를 살피니 5월 23일 육군 모 부대에서 군기훈련을 받다 쓰러진 훈련병이 민간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다가 상태가 악화, 5월 25일에 숨졌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후 '육군 12사단 얼차려 가혹행위 사망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보도를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망 시점은 5월 25일 토요일이고, 속보가 뜬 시점은 하루가 지난 5월 26일 일요일 저녁인데 만 하루 안에 순직 결정이 되고, 그걸 보도까지 한 것이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례적으로 빠른 순직 결정, 그런데...
사망한 군인은 전사자, 순직자, 일반사망자로 구분된다. 구분은 군에서 임의로 하는 것은 아니고, '군인사법'에 따라 육·해·공군에 설치된 보통전공사상심사위원회에서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 위원회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13명 이상 50명 이내의 위원이 있고, 한 번 회의 할 때마다 전체 위원 중 각 군 참모총장이 지정하는 9명이 해당 회의를 맡아서 진행한다. 9명 중 5명 이상은 민간인으로 해야 한다. 만약 보통전공사상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하는 경우 유가족은 국방부에 설치된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에 재심사를 요청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 훈련병 순직 결정은 사망 당일부터 보도 시점인 다음 날까지 만 하루 사이에 참모총장이 민간인 전문가를 포함한 보통전공사상심사위원회를 소집하여 의결 절차를 거치고 그 결과를 결재했다는 얘기가 된다. 시점이 주말임을 감안하면 매우 신속한 의사 결정 과정을 거친 셈이다.
비슷한 사례로 지난 해 7월 19일, 예천 내성천에서 무리하게 수중에서 수해 실종자를 수색하다 실종, 같은 날 밤 11시경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 고 채 상병에 대한 순직 결정은 그보다 빨리 이루어져 20일 오전에는 이미 '순직자'로 보도된 바 있다.
박 훈련병도, 채 상병도 현행 법령상 순직자로 예우받는 일은 이론의 여지없이 당연하다. <군인사법>에 따르면 의무복무 기간 중에 사망한 병사는 물론, 초급 간부들도 본인의 중과실로 인해 사망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순직자로 예우받는다.
상관으로부터 규정을 위반한 가혹행위를 당하다 사망한 박 훈련병이나 구명조끼도 받지 못하고 물속에 들어가 수해 실종자를 찾으라는 상관의 지시를 이행하다가 사망한 채 상병이나 누가 언제 심사했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국가의 예우를 받는 '순직 결정'의 결론에 닿았을 것이다. 신속한 결정으로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권장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국방부와 각 군의 순직 결정이 매번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상은 사건마다 들쭉날쭉으로 편차가 심하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사망 원인이 명백한 군의 책임이고, 여론이 좋지 않고, 보도량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건에 대하여 순직 예우를 '여론 달래기'용으로 쓰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몇 년씩 걸리는 순직 심사, 이유도 알 수 없다
▲ 군인권센터와 군 사망사건 유가족은 2023년 11월 28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22년 11월 강원 인제군 GOP(일반전초)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해 목숨을 끊은 고 김상현 이병(당시 21세) 유가족이 사망사고 원인 규명과 변사사건 수사 종결을 요구했다. ⓒ 복건우
실제 순직 심사 시점은 고무줄처럼 제멋대로 늘어진다. 상황과 조건을 모두 '의무복무' 중 사망한 군인에만 맞추어보아도 그렇다. 2021년 7월, 공군 20전투비행단에서 발생한 '강 하사 사망 사건'의 경우 괴롭힘 정황이 확인되었음에도 사망 시점으로부터 3년여가 지난 2024년 4월에 이르러서야 순직 결정을 받았다. 2023년 4월, 특전사 9여단에서 사망한 A상병 사망 사건의 경우에도 부대 관리 소홀, 괴롭힘 등의 정황이 확인되었지만 순직이 인정된 시점은 1년 2개월이 지난 2024년 6월의 일이다.
2022년 11월 육군 12사단에서 선임들의 가혹행위로 전입 1개월여 만에 사망한 김상현 이병 사망 사건의 경우 2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아직도 순직 심사 절차도 개시되지 않았다. 세 사람의 피해자 모두 진상규명과 예우가 마무리되지 않은 까닭으로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해 시신이 국군수도병원 영현실 냉동고에 안치되어있다.
각 군은 각 사례마다 순직심사가 늦어진 이유로 '강 하사 사망 사건', '김상현 이병 사망 사건'의 경우 '변사사건 수사 미종결'을 꼽았고, 'A 상병 사망 사건'의 경우 사건과 관련하여 진행 중인 재판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유가족에게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이상한 설명이다. 앞서 살펴본 '박 훈련병 사망 사건'이나 '채 상병 사망 사건'은 변사사건 수사가 종결되기는커녕 개시도 되기 전에 순직 결정이 이루어졌다. A 상병의 경우 소위 '진행 중인 재판'이란 것은 A 상병 사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재판이다. 소속 부대 중대장이 A 상병 사망 이후 책임을 면하기 위해 상담기록을 조작한 것이 적발되어 재판을 받고 있을 뿐, 군이 진상규명을 미적거린 탓에 가해자들에 대한 수사, 재판 절차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이처럼 군은 순직 심사가 몇 년씩 걸려야 할 이유로 타당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지난 20일 사망으로부터 3년 2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 공군 고 이예람 중사 역시 2021년 5월에 사망한 이후 1년 8개월이 지난 2023년 2월에 이르러서야 순직 결정을 받았다.
▲ 2023년 2월 9일 고 이예람 중사의 사망을 '순직'으로 판단한 공군은 이 중사가 안치돼 있는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에게 순직확인서를 전했다. ⓒ 유족 제공
이처럼 순직 심사가 고무줄처럼 늘어지는 데는 명확한 기준이 불분명하여 결국 순직 심사가 '군 지휘부 의중'에 따라 좌지우지 되고 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행 법령에는 순직 심사를 어디서, 어떻게 진행해야 한다는 정도가 규정되어 있을 뿐, 언제까지 순직 심사를 마무리해야 한다던가, 순직 심사를 위한 사전 조사 절차가 다른 수사, 조사 절차에 귀속되어야 하는지 여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니 군 내부 절차를 잘 알지 못하는 유가족들은, 하염없이 군에서 해주는 말만 믿고 고인의 장례를 언제 치를지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에 대한 국가의 예우는 당연히 예측 가능해야 한다. 기준과 시기와 결과가 들쭉날쭉해선 안 된다. 유가족이 뛰어다니면서 순직 심사를 독촉해야 하고, 순직 결정은 부모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언제까지 유효한 말이어야 하는가.
이 역시 군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사람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 탓이다. 책임 통감과 재발 방지, 고인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군의 필요를 중심에 두고 예우의 속도와 내용을 다르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연이은 사건으로 군 사망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다. 피해자와 유가족을 중심에 둔 신속하고 명확한 순직 심사 제도를 재설계해야 할 때다.